‘빠삐용’ 국군포로 김성태의 북한 탈출기

작성자
zsky
작성일
2015-06-28 17:35
조회
1657


50년 6월 잡혀 탈출하다 13년형 … 51년 만에 4전5기 성공


한국전쟁 62주년 … ‘빠삐용’ 국군포로 김성태의 북한 탈출기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 제275호 | 20120617 입력

국군포로 탈북자 김성태(80)는 빠삐용이다.
절해고도의 감옥에서 탈출 의지를 불태우다 마침내 뜻을 이룬 영화의 주인공. 김씨는 6·25 발발 닷새 만에 포로로 잡혔지만 끈질긴 탈출 시도 끝에 마침내 2001년 북한을 벗어났다.
51년 만이었다.

인민군 부대, 교도소의 감시 속에서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놓지 않았다.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포기는 없었다.
지난 14일, 62년 만에 자신이 포로로 잡혔던 경기도 양주시 덕정리를 찾았지만 그곳은 너무 변해 있었다.
그래도 그를 태운 북행 포로 열차가 출발한 덕정역은 그날의 기억을 새롭게 했다. 거기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국군포로 김성태씨가 15일 6·25 전쟁 초기인 50년 6월 30일 북행 포로 열차를 탔던 덕정역(붉은 원안)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62년 만에 이역을 다시 찾았다. 조용철 기자

해가 지면 아직 싸늘한 1954년 4월의 어느 밤. 함흥 교화소는 짙은 어둠에 잠겼다.
모두가 잠든 그 시간, 죄수 김성태(22)는 눕지도 못한 채 앉아 있어야 했다. 벌써 보름째.
그가 앉아 있는 곳이 좀 이상하다.
높이는 앉은 키보다 약간 높고, 폭은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벽돌로 만든 토굴 같은 곳.
징벌 독방이다. 몸이 뒤틀려도 못 펴고 종일 앉아 있어야 한다.

먹을 거라곤 콩 버무리에 강냉이를 간간이 심어 갓난아이 주먹만 하게 만든 것뿐.
하루 세 번 주지만 20대 초반 젊은이에겐 턱도 없다.
그걸 꼭꼭 씹어 물처럼 만든 뒤 천천히 삼킨다.
완전히 소화시켜 양분을 다 빨아들이기 위해서다.
움직이지 못하니 대소변도 그 자리에서 해결한다.
씻지도 움직이지도 못해 몸에서 썩은 내가 진동하는 짐승의 처지.
성태의 마음에 불이 인다. 어떻든 살아서 고향으로 가야 한다.

김씨의 죄목은 탈옥 시도다.
보름 전 그는 자신이 13년 형을 받고 수감된 교화소를 탈출했다.
당시 북한은 전후 복구가 한창이어서 함흥 교화소 죄수들도 남포 제련소에 배치됐다.
낮엔 벽돌을 만들고 날랐다. 김씨는 주변을 훑으며 도망 기회를 엿봤다.
어느 날 오후 3시쯤, 용변을 핑계로 슬슬 길을 벗어나다가 휙 숨어버렸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돌아보니 아직 눈치를 못 챘다.
목표는 남쪽. 부지런히 걷고 걸어 평남 용강까지 왔다.
끊임없는 허기. 빈 농가에 스며들었지만 허탕이었다.
옷만 훔쳐 푸르스름한 죄수복을 벗고 갈아 입었다.
결국 지쳐 벌판에 고꾸라졌다. 새벽 한기에 정신이 나 길을 재촉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황톳길로 접어들자 잠복해 있던 교화소원들이 그를 둘러쌌다.
어떻게 알고 숨어 있었는지 지금도 모를 일이다.
탈옥 24시간도 안 됐다. 끌려온 그는 죽도록 맞았다.
교도관들이 “조국을 반역한 놈이 또 탈출했다”며 채찍과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온몸이 퉁퉁 붓고 얼굴은 피범벅이 됐다.
그리고 독방행. 그나마 형기가 안 늘어 다행이었다.
몸은 욱신거렸지만 뇌리에는 실패했던 그간의 탈출이 떠올랐다. 벌써 네 번째다.

32년생인 김씨는 48년 고향인 경기도 포천에서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2남 1녀의 맏이인데 소작농인 부모의 부담을 덜려고 나이까지 속여가며 입대했다. 경기도 동두천읍 초성리의 7사단 1연대 3대대에 배치됐다. 대대장 연락병으로 있다 이등 중사가 된 50년 3월부터는 의정부시 인근에 있는 별내 하사관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됐다. 6·25 바로 전날도 그는 열심히 교육 받다 별생각 없이 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새벽 4시30분. 천둥 같은 소리에 깼다. 비는 안 오는데….

그 소리가 그 뒤 3년 동안 한반도를 불바다로 만든 포성이란 건 생각도 못했다.

아무도 영문을 몰랐다.
그런데 오전 9시쯤 되자 동두천이나 덕정으로부터 피난민들이 꼬리를 물고 내려왔다.
곧 부대가 소집됐다. 북한이 공격했다고 했다.
김씨도 M1 소총을 들고 탄창 8개를 지급받은 뒤 트럭에 올라 소대와 함께 북으로 향했다.

그가 배치된 곳은 지금의 3번 국도 옆, 덕정 약간 못 미친 야산이었다.
그의 대대도 105㎜포, 68㎜ 박격포로 동두천·고량읍·문산 쪽을 향해 쐈다.

우등 사수였던 김성태도 쐈다.
10발 중 8발을 맞혀 인민군 50명쯤 쓰러뜨렸다. 그러나 80발 정도밖에 없는 탄알이었다.
화력이 부족했다.
따발총이라고 불린 북한군 기관총에 전우들이 픽픽 쓰러져갔다.
그러나 본부와는 연락 두절이었다. 김씨는 몰랐지만 당시 상황은 심각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의 ‘6·25 전쟁사’에 따르면 동두천-덕정으로는 북한의 주력인 4사단이 105전차 여단을 앞세워 밀고 내려왔다. 국군은 힘없이 무너졌다.
7사단의 포천-동두천 방어선은 25일, 의정부 방어선은 26일 함락됐다.
28일 새벽 북한군은 서울에 진입했고 이승만 정부는 한강교와 광진교를 폭파했다.
전방에서 싸우던 국군은 철수 명령도 받지 못하고 고립됐다.

그걸 알 수 없었던 김씨는 총알을 아껴가며 쏘고 숨고, 쏘고 숨었다.
그러나 닷새째 되던 30일, 혼자 남게 된 김씨는 무기를 볏짚단에 숨기고 인근 농가에서 베잠방이를 얻어 입었다. 모내기가 한창인 늙은 농민들 속으로 숨었다.
그런데 멀리서 치안대 3명과 인민군 경비대 2명이 총을 겨누며 왔다.

“국군들은 나오라.” 그 자리에서 국군 4명과 농민 한 명이 잡혀 끌려갔다.
첫 탈출 시도는 그렇게 좌절됐다.

가보니 대대 작전참모, 정찰참모도 있었다.
모두 15명인 포로들은 다음날 오후 3시 덕정역으로 끌려갔다.
김씨 또래의 젊은 인민군 경비대 병사가 총을 겨눴다.
김씨는 “그래도 총살 걱정은 안 했다”고 했다.
화물칸에 포로를 태운 기차는 연천에서 포로를 더 태운 뒤 북상했다.
이틀 뒤 도착한 곳은 함경북도 회령.

수용소로 변한 옛 일본군의 군마훈련소엔 이미 1500명의 국군 포로가 있었다.
김씨는 “커다란 시멘트 건물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포로들은 재편돼 뿔뿔이 흩어졌다. 공산주의 교육이 시작됐다.
종일 ‘인류사회발전사’니 ‘공산주의사회’니 하는 강의를 들었다.

생활은 고달팠다. 굶주림으로 창자가 쓰렸다. 잡곡 한 덩어리에 시래깃국이 고작이었다.
영양실조로 픽픽 쓰러졌다. 15평 감방에 40명을 몰아넣었다. 목욕은 꿈도 못 꿨다.
감방 바닥은 일식 다다미에 천을 두른 것이었는데 아침에 천을 털면 살아있는 이가 한 사발씩 나왔다. 그것들이 깡마른 포로들의 피를 빨았다. 죽음은 늘 주변에 서성댔다.

그해 11월 다시 이동했다.
(인천 상륙 작전 뒤 한국군과 유엔군이 치고 올라와 북이 수세에 몰리자 포로를 옮기는 것이었다.) 기차에 탄 포로가 1200명 정도로 줄었다. 그새 300명이 죽은 것이다.
기차는 두만강을 건너 한자로 이름을 쓴 한 학교 터에 그들을 내려줬다.
중국 노도구 도원(桃原)촌이었다.

다시 허기지고 힘든 생활이 시작됐다. 특히 물이 엉망이었다. 씻어도 때가 안 지워졌다.
포로들은 피부에 때가 덕지덕지 껴서 허옇게 각질이 일어났다.
그러다 1951년 3월 14일 또 열차에 실려 신의주 부근인 백마로 이동됐다.

상황이 달라졌다.
포로들은 해방전사라는 이름으로 후방 업무에 투입됐다.
김씨는 군마훈련소에 보내졌다.
당시 사회주의 국가였던 몽골이 야생마를 지원했다. 포로당 두 마리가 배당돼 돌봐야 했다. 굶주린 포로들은 사료를 훔쳐 먹었다. 말은 ‘무언(無言)의 전우’라며 못 먹게 했지만 죽은 말의 뒷다리를 잘라 몰래 삶아 먹기도 했다.

군마훈련소엔 김완일이라는 이름의 특무상사가 있었는데 김씨에게 가혹했다.
포로 출신이라며 무시하고 야비하게 굴었다. 52년 가을 김씨는 무단 이탈했다.
평안남도 강동의 초대소에 가면 소속 부대를 옹진으로 바꿀 수 있다고 들어 거기까지 갔다.
옹진을 가면 남한으로 가는 길이 짧아진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부대 이전이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식량공급 증명서 같은 것을 보여달라고 했다.
무단 이탈한 처지에 그런 게 있을 수 없었다. 결국 열흘 뒤 부대로 복귀했다.
그렇게 두 번째 탈출 시도는 무산됐다.
귀대해 “특무상사 때문에 그랬다”고 변명했는데 다행히 부대장이 봐줬다.
김완일만 다른 곳으로 쫓겨났다.

세 번째 탈출 시도는 보다 조직적이었다.
부대에서 장경남, 심OO, 김OO와 의기 투합했다.
“부대가 전방으로 가면 남으로 탈출하자”고 모의했다. 특히 장경남씨가 적극적이었다.
이름도 서울 경(京)에 남녁 남(南)으로 스스로 지었다.
하지만 모의가 채 무르익기도 전에 헤어져야 했다. 장경남이 돌연 부대를 옮기게 됐다.
(그도 마침내 탈북했다.) 김씨의 부대도 이동했다.
약 한 달뒤 화천 부근까지 와 김씨는 정찰 소대에 배치됐다.
전선을 정찰하면 기회가 더 많아진다. 가슴이 뛰었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김씨와 심OO, 김OO이 고발됐다.
보위부의 조사를 받은 뒤 53년 7월 25일 군사재판에서 ‘민족 반역자’ 혐의로 징역 13년을 받았다. 그는 함흥의 교화소에 수감됐다.

탈출의 문은 더 좁아졌다. 밥도 적고 일은 몸이 부서질듯 많았다.
남포 조선소로 노력동원된 뒤에도 그랬다. 사람들이 죽었다.
어느 날 제련소에서 1㎞ 떨어진 숙소로 단체로 돌아가는데 앞선 죄수가 맥없이 쓰러져 다시 못 일어났다. 같은 방 죄수도 자고 일어나면 한두 명씩 죽어 나갔다.
김씨는 수감 9개월여 만에 대담한 대낮 탈출을 감행했다.
벽돌 토굴에서 징벌을 받게 된 이유다.

두들겨 맞고, 벽돌 토굴에서 15일 징벌을 받았지만 그래도 꺾이지 않았다.
대신 신중해졌다.
머릿속에 지도를 그렸다.
황해도의 교화소로 가는 게 좋겠다.
지리 공부를 했다.
주판을 만들어 셈하는 척하면서 거리를 계산했다.
그러다 무심히 죄수들에게 “옹진에서 남한까지 거리는 얼마냐”고 물었다가 조사받는 큰 홍역을 치렀다. ‘인민공화국에 충성하겠다’는 서약서를 몇 번씩 쓰고 벗어났다.
그래도 몇몇 죄수가 탈출 땅굴을 파다 들켰다는 소문에 또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형기 13년을 꼬박 채우고 66년 7월 석방됐다.

22세에 교도소에 들어가 젊음을 다 보낸 뒤 35세가 된 그는 함경북도 온성군의 추원탄광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23년간 광부로 일했다.
성분 문제로 평양에서 추방된 여성을 만나 아들도 둘 낳았다.
국군포로 딱지 때문에 늘 시찰받았고 두 아들은 정규 교육도 못 받았다.
78년 8월 아내마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 내외도 90년대 초 강도에게 쇠절구로 맞아 사망했다.

김씨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탈출 시도에 불을 지핀 건 같은 동네에 살던 당원 안호준이었다. 2000년 4월 그가 가자고 했다. 김씨는 맏아들과 중국 심양으로 간 뒤 2001년 6월 서울로 왔다. 4전 5기 끝에 찾은 조국. 그는 “나라에 모든 게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스마트 폰을 불쑥 내밀고는 “내가 지금 이걸 쓸 줄 아오. 북에 있었다면…”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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